임주리 기자
김기식 국회미래연구원장. 사진=국회미래연구원
[한국의정신문 임주리 기자 ]
법정 정년 연장을 둘러싼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 중고령 노동의 현실은 정년 이후가 아니라 정년 이전부터 이미 갈라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수의 중고령자는 정년을 채우기 전에 주된 일자리에서 이탈하고 있으며, 이 시점이 이후 노동 경로와 노후 소득 수준을 결정짓는 핵심 분기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회미래연구원(원장 김기식)은 1월 21일 발표한 연구보고서 「생애 주된 일자리 퇴직의 현실과 정책 과제」를 통해, 중고령자의 노동 현실을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정년 중심 정책 논의의 한계를 지적했다. 보고서는 ‘정년을 늘릴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언제, 왜, 어떤 조건에서 주된 일자리를 떠나는가’를 정책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만 50~69세 1,46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주된 일자리의 평균 퇴직 연령은 약 54세로 나타났다. 퇴직 시점은 50대 초반부터 60대 초반까지 폭넓게 분포했지만, 정년까지 동일한 일자리를 유지하는 경우는 소수에 그쳤다. 특히 근속기간 5년 미만 노동자의 경우 54세 이전에 이탈한 비율이 60.6%에 달한 반면, 30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경우 60~64세에 퇴직한 비율이 52%로, 근속 기간에 따라 정년 접근성이 뚜렷하게 갈렸다.
퇴직 사유를 보면 정년퇴직은 24.6%에 그친 반면, 비자발적 퇴직은 34.5%로 더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중고령자의 은퇴가 개인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구조적 요인에 의해 앞당겨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는 주된 일자리에서의 이탈이 이후 노동 경로를 좌우하며, 단시간·저임금·불안정 고용으로의 질적 하향 이동과 노후 빈곤 위험을 구조화한다고 지적했다.
주된 일자리 형성 단계부터 성별·산업·사업체 규모에 따른 분절 구조도 확인됐다. 남성 상용직 비중은 78.6%였던 반면 여성은 68.1%에 그쳤고, 남성은 제조업에, 여성은 교육·보건 분야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사업체 규모에서도 남성은 1,000인 이상 대규모 조직 근로자가 21.2%였으나 여성은 7.0%에 불과해,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성별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비임금근로자의 상황은 더욱 취약했다. 주된 일자리의 평균 폐업 연령은 53.5세로 임금근로자보다 낮았으며, 대부분 영세한 사업체에 종사하고 있었다. 폐업 사유의 절반 이상은 수익 부족과 시장 제약으로, 개인의 경영 실패라기보다 구조적 한계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여성 비임금근로자의 경우 건강이나 돌봄 사유가 더해져 폐업 원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퇴직 이후의 경제적 어려움 역시 뚜렷했다. 비임금근로자의 59.2%가 퇴직 직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응답해 임금근로자보다 높은 비율을 보였다. 임금근로자는 퇴직금과 실업급여 등 제도적 보호를 일정 부분 활용했지만, 비임금근로자의 64.6%는 이용 가능한 제도가 없다고 답해 정책 사각지대가 확인됐다. 재취업 과정에서도 공식 제도보다는 개인 인맥이나 비공식 네트워크 의존도가 높아, 전환기 관리 체계의 부재가 드러났다.
보고서는 이러한 현실을 종합해, 한국의 고령층 노동시장이 ‘정년 이후를 버티는 구조’가 아니라 ‘정년 이전에 이미 분기되는 구조’로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정년 연장 논쟁만으로는 중고령 노동의 불안정성과 노후 위험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국회미래연구원은 정책 과제로 ▲조기퇴직을 늦추기 위한 고용 유지 전략 ▲주된 일자리 이탈 이후 전직·전환기 관리체계 구축 ▲리스킬링 기반 경력 전환 지원 ▲민간 커리어컨설턴트를 활용한 전직 지원 모델 ▲60대 이후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 제도화 ▲비표준·비임금 노동 확대에 대응한 사회보험 및 최소 보장 체계 재구성을 제시했다.
보고서 저자인 정혜윤 부연구위원은 “다수의 중고령자가 정년에 도달하기도 전에 전환기에서 밀려나고, 이 과정에서 질적 하향 이동과 사회보험 공백이 발생하고 있다”며 “필요한 것은 정년을 늘리는 논쟁이 아니라, 전환경로 중심의 노동시장 구조 개편”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보고서는 정년이라는 단일 기준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중고령 노동의 현실을 드러내며, 정책 논의의 초점을 ‘정년 이후’가 아닌 ‘정년 이전의 전환기’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분명히 제기하고 있다.